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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여성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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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WSCS 작성일 10-01-23 20:52 조회 3,1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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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세계만방을 향하여 한민족이 살아있음을외친 함성이었다. 민족의 굴욕과 수모를 씻고 자주독립을 하기 위하여는 반상의 계층을 넘었고 지역과 종교와 성별의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 동참했다. 특히 감리교 여성중에 민족운동의 기수들이 많았다.

3.1운동하며 유관순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데 유관순은 감리교 여성이다. 일제의 아력으로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유관순은 사촌 언니인 유애도와 함께 조용한 고향 옥천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동그란 얼굴에 해 맑은 미소를 지닌 애띤 소녀 유관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사랑과 자주독립의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철저한 믿음으로 고향 교회인 매봉교회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밤마다 태극기를 만들고 교인들의 연락망을 통하여 인원동원을 주선하면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유관순 아버지 유중권과 삼촌 유중무, 오빠 유무석, 사촌 언니 유애도, 가족과 친척 모두 힘을 모아 전력했다.

만세시위는 아오내 장날로 정했으며 그날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옥천 여섯고을에서 모여든 3천 여명이 만세 시위를 했다. 그대 시위 현장에서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유관순도 그날 집에서 체포되어 자기가 아오내 만세시위의 주동자라고 처음부터 당당히 밝히고 공주와 서울에서 옥중투쟁을 전개하였다. 복역중에도 그는 1920년 삼일만세 1주년 기념난세를 죄수들과 벌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심한 고문과 구타로 1920. 10. 21일 결국 옥사했다. 갖피어오른 아름다운 꽃봉우리 유관순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민족의 꽃송이로 향기를 발하게 되었고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려지는 감리교 여성으로 민족사에 기리 빛나고 있다. 당시 어윤희, 신관빈, 권애라, 심명철 등은 모두 감리교 여성이다. 3.1만세 시위로 전국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와 교회는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화학당, 배화학당, 호수돈여학교, 미리흠여학교, 원산루씨학교, 수원삼일여학교 등은 독립운동의 핵심이었고 여성지도자의 산실이었다. 특히 남성독립운동가들의 경제적 지원과 연락을 여선교회 조직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도왔고 인원동원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수감되고 해외로 망명을 한 투사들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하였으며 애국부인회를 조직 이애라, 조신성, 이신애, 안경신 등 감리교 여성이 주역이었다. 보호여회 2대 회장이었던 하란사는 1900년 미국에서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고 돌어와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1916년 미국감리교회 총회(뉴욕)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함으로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고 의친왕과 신흥우 등이 밀사후보로 거명되고 하란사도 고종의 밀사로 내정되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하란사는 고종의 서거후 중국으로 망명 북경에서 의문의 식중독으로 급사했다. 일본의 첩자로 활약하던 배정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감리교 여성들 중에 특히 여선교회 역대 회장님들은 대부분 민족운도에 기여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홍에스터, 이효덕, 김일호, 박현숙 등 모두 민족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선각자였다. 자주독립과 자유와 평등의 길을 닦았고 선배 감리교 여성들의 활동과 눈물의 기도가 8.15해방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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