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미 감리회 첫 선교사였던 매클레이는 학교와 병원을 설립해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고 제한적 선교를 할 수 있었다.1885년에 미 감리회는 6명의 선교사 가족을 파송했다. 아펜젤라 부부과 스크랜튼 의사의 가족 4명이었다.
Scranton부인은 결혼하기 전 본래의 이름은 Many Benton이었으나 결혼하여 William T.Scranton의 성이 붙여져 Mary Scranton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872년 남편의 사망으로 그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추억속에 간직되었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부에서 선교활동에 전력했다. 그의 외아들은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유능한 의사였다. 아들 Scranton이 장티푸스에 걸리게 되고 귀여운 손녀까지 심하게 아프게 되는 어려움 속에서 신유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가 늘 바라던 조선의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다.
자신이 관여하던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부의 파송으로 1885년 2월 3일에 샌프란시스코를 …
1852년 4월 텍사스주 켐부리 목사와 결혼했으나 1880년 남편과 사별 또한 두자식을 잃고 큰 절망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체험하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선교에 몸바칠 것을 결심했다. 처음 어려운 중국선교를 하던 중에 조선 선교에 뜻을 가지게 되고 1897년 10월 2일 여자어린이 2명과 남자어린이 3명으로 배화학당의 전신인 캐롤리아 학당과 인천내리교회 여학교(영화여학교)를 설립 교육에 열정을 쏟았으며 부활절날 학당기도실에서 기도하다가 응답받고 1900년에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를 세웠다.
선교와 봉사로 늘 바쁘던 그의 몸에 이상이 오게 되너 1918년 미국으로 신병치료하러 갔으나, 그는 "조선에서 헌신했으니 조선에서 죽겠다"라고 아픈몸으로 돌아와 그가 사랑했던 이땅에서 1920년 11월 12일 향년 66세로 소천하시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그의 육은 무치다. 23년이란 긴 세월을 조선의 복음을 위햐여 촛불이 되었던 그는 우리에게 유언을 …